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빅터 프랭클 지음 /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그동안 너무나 많이 들어왔던(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끔찍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것이다. (p.25; 5-9)

 지금까지 우리가 나치 독일에 관한 영상이나 글을 읽었을 때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지 잘 생각해보자. 당시 연합국이나 현대인의 입장에서 나치 독일의 행태를 그저 '잔혹한 것, 홀로코스트!'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기분이었을지 수감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29; 5-12)

 위에서 말했듯 우리가 수감자의 입장이라면 과연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 죽어 갔을까?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선(善)을 지키는 것은 나름대로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경쟁에서 패배한 사망자일 뿐이기도 하다. 힘세고 영리한 방법보다 간사하고 파렴치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수감자들은 생존을 갈구하는 악인(惡人)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감자들이 카포가 되고 싶어 갖은 잔인함을 갖춘 인간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p.49; 5-8)

 여기서 말하는 첫번째 단계는 소지품을 모두 빼앗기고, 나체로 매질을 당하며 초면인 사람들과 함께 샤워를 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이후로 씻을 수도 없고 상처를 치료할 수도 없는 일련의 고충들의 집합이다. 그들은 잠깐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살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끼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자살을 통해 고통스럽게 죽으나 가스실에서 죽으나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파트의 제목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는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p.71; 1-3)

 수감자들은 점차적으로 모든 일에 무감각해졌다. 그래서 정서도 메마르게 되었다. 본문에서 필자는 타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에서 고향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다른 수감자들에게 애원과 간청을 아끼지 않지만, 그들은 "여기서 살았었다고? 그렇다면 벌써 실컷 보았겠네!"라는 말로 비웃으며 묵살했다. 법치가 불가했던 고대 인간의 삶은 힘을 가진 자에 의해 이렇게 지배당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 공화정이 대세인 시대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행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p.88; 12-14)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 맞다. 다른 수용소로 옮겨 가면서 화장장이 없는 수용소로 가는 것이 기뻐 환호한 필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고질적으로 확대되어 온 사회의 무기력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중재가 필요하다. 행복 지수 1위라는 부탄의 일반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행복 지수라는 다소 주관적인 지표를 믿는 대신 오늘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 행복을 위해 노력해보자. 적어도 나는 그게 진짜 '삶'이라 생각한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p.137; 1-4)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p.137-138; 13-17, 1-3)

 삶의 목적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면 삶을 살기 위해 무언가 성취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답을 후자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필자의 글을 보는 순간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에 의문이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화용적 언어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성인이라면 부정이나 거절의 어조도 약간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극한 상황 속에서 지금의 삶을 얻어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삶에 남이 끼어들어 간섭하기는 힘들다. 어디 가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고민을 해결할 의지를 가진다면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p.145; 5-11)

 정말 유명한 니체의 명언이다.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길게 말하진 않을 테지만, 한 마디로 필자의 입장을 말해주는 어구라서 인용해보았다.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집단에 들어가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 감시병 중에도 가끔씩은 좋은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p.152; 2-9)

 도덕 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성선설'과 '성악설'을 믿을 수 없는 이유이다. 가장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동물인 인간을 완벽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순 없다. 책과 같이 두 부류로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저번 학기 '말과 마음' 수업에서 들었던 것에서 생각해보자. 어떤 단어를 정의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속성의 집합체로 보는 것과 어느 집합의 전형으로 대표되는 한 가지를 생각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이다. 인격이 어떤 속성을 지니는지 생각해본다고 치면, 각자의 인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한 가지 명제에 대한 참, 거짓을 가리기 쉽지 않다. 모든 인격이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포함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것이 한 예이다. 만약 인격이 어떤 전형으로 대표될 수 있다고 하면 그 누구의 인격이 인격의 대표가 될 것인지 정할 수 없다. '인격'은 복잡한 추상명사이다.

 선과 악을 0과 1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품성을 평가한 데이터를 점 그래프로 나타내면 거의 연속적인 정규분포표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형이상학에서도 수학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ㅋㅋㅋ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p.154; 9-16)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었다. 위에서는 분명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오랜 수감 생활에서 갑작스럽게 해방을 맛보게 되었다. 느끼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갈망하던 해방이라는 꿈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이 순간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이전의 힘들었던 나날들과 현재의 차이를 몸이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현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마지막 줄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은 비단 유럽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하던 날, 우리 국민들은 환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뒤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 민족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며 만세를 불렀다. 수감자들또한 이후에 못 먹던 밥을 몰아서 엄청나게 먹었다는 부분에서 그제서야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성취를 이루어도 이처럼 바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자. 기다리면 내 성취의 의미를 깨닫고 환호할 날이 다가올 것이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p.157; 13-19)

 사람답게 살지 못하던 수용소의 환경에서 벗어난 수감자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그런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 해방이 아니라 지위가 향상된 것이라고 착각한다. 수감자라는 집단이 선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살아남는다는 면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었을지 모르나 결국 인격적으로 실패한 동물이 되기를 자처하였다. 그들은 나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와도 같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지게 해준다. 나의 아버지는 꾸중을 하실 때나 고민을 들어주실 때 항상 극한 상황으로 치닫았을 때의 이야기를 하셨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말투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너무 어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좋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씀 하나하나에 나의 의지를 북돋아주고 혼자 이겨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려고 했던 의도가 가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기력'이 만연한 요즘, 우리는 이 책을 보고 '어떤 것'을 느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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