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미래

인구학이 말하는 10년 후 한국 그리고 생존전략

조영태 지음 / 북스톤



 기성 세대들은 살기 힘들다는 젊은이들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바라보고 으레 최선을 다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하기 쉽다. 나 또한 그런 기성 세대들의 인식에 익숙해져서 그런 생각이 당연한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은 후에는 그러한 선입견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정해진 미래'는 미래 한국의 다양한 면을 인구학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부분이 적지 않아 쉽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무엇때문에 힘들다는지 알고 나면 세대 갈등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


 1995년에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 평균 4.9명이 살았다. 그 후 평균 가족 수가 줄기 시작해 2010년에는 2.7명이 살았다. 15년 사이에 2.2명이 감소한 것이다. 특정 규모 아파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평수 아파트에서 비슷한 비율로 줄었다. 그러다 2005년 이후에는 큰 변화가 없어서 소형(60㎡ 이하)에는 2.1명, 중소형(60~85㎡)은 3.3명, 중대형(85~135㎡)에는 3.9명, 그리고 대형(135㎡ 이상)에는 6.9명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p.53; 14-20)

 그 사이 서울시의 인구가 이와 똑같은 비율로 줄어든 것은 아니니, 한 가구의 가족 수가 줄었다는 것은 그만큼 가구 수가 늘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서울시의 가구 수는 2000년 약 312만에서 2010년 약 350만 가구로 증가했다. 주목할 점은 증가분의 상당수가 1~2인 가구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p.54; 2-7)

 자, 여러분이 아파트 투자를 고려한다면 이 정도 설명만으로도 중대형 아파트에 대한 매력은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1~2인 가구가 살기 적당한 작은 아파트를 사야 할까? 인구변화 추이를 보고 작은 아파트를 샀으니, 이 투자는 성공했다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자꾸 물어본다는 것은 답이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맞다. 실패한다. 왜 그럴까?

 첫째, 그동안 부동산 가격은 대형 아파트가 올려놓고 작은 평수가 따라가는 구조였기 때문에 대형 아파트 가격이 무너지면 다른 평형 아파트도 같이 위험해질 가능성이 크다. 대형 아파트의 몰락과 함께 부동산 불패신화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는 뜻이다.

 둘째, 단순히 가족이 적어진다는 사실만 보아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미래의 1~2인 가구는 아파트를 구매할 여력이 없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일단 젊은이들은 집을 살 여건이 안 된다.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와 같이 현재 우리나라의 20~30대는 이전 세대의 그 연령대에 비해 구매력이 현저히 낮다. 이전 세대들이 20대 초중반에 경제활동을 시작했던 반면 현재의 20~30대는 구직난 때문에 30대가 되어야 경제활동을 시작하기 일쑤다. 이들이 10년 뒤 30~40대가 되어도 당연히 지금의 30~40대에 비해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을 터이므로, 투자를 목적으로 아파트 구매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p.56; 8-20, p.57; 1-11)

 아파트 투자에 대한 저자의 의견이다. 소형 아파트의 가격은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높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부동산 시장 자체가 흔들리기 쉽다는 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청년층의 구직 및 생계 유지를 위한 어떤 답이 필요할 것 같다.


 일단 이는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20대 초반 연령대를 위한 노동 시장은 다른 연령대에 비해 숙련도나 전문성을 많이 요구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연령대의 노동시장은 진입적 성격이 강하고,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이거나 시간제 근로인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이러한 미숙련 인력을 고용해 기업 내부에서 교육을 시켜가며 경력자로 키웠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기업에서도 업무를 가르쳐가며 키울 여력이 없어졌다. 그보다는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숙련자 위주로 채용하는 바람에, 20대가 참여할 수 있는 노동시장의 규모가 다른 연령대의 노동시장에 비해 훨씬 작아졌다. (p.115; 10-18, p.116; 1-3)

  여기부터는 청년의 삶이 왜 힘든가?에 대한 답변이다. 20대의 취업 전선은 다른 세대에 비해 더 고전해야 하는 시간이다.


 이런 다양한 요인들이 중첩되면서 20대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있다. 더 심각한 사실은 지금의 10대인 저출산 세대의 인생은 지금의 20대보다 더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의존도 더 심해질 것이다. 30대가 되면 부모 세대보다 월급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 지금의 20대가 부모보다 가난한 첫 세대가 될 것이라고들 말하는데, 그들보다 사실상 저출산 세대의 미래가 더 어둡다. (p.117; 16-20, p.118; 1-3)

 '정해진 미래'라는 제목은 대한민국 사회의 어두운 미래를 내포하고 있다. 세대가 갈수록 저출산과 고령화에 의한 생활고는 심해질 것이다.


 인구학은 어느 특정 연령대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따라가며 관찰한다. 이 사람들이 어떤 시기를 사느냐, 어떤 코호트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인구학에서는 어느 특정 연령보다는 그 즈음 같이 태어난 사람들의 크기가 더 중요하다. 이를 '코호트'라 하는데, 일상적으로는 '세대'라는 개념과도 비슷하다.

 내가 대학을 졸업한 1997년에는 외환위기 때문에 어려웠지만 그래도 대부분 졸업하면 직장을 가졌다. 그때 내 또래들의 기대는 '내가 마흔 정도에는 그래도 부장쯤은 돼 있겠지'하는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내 윗 세대, 그리고 내가 속한 코호트가 그런 길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베이비부머 2세대들은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신입직원들은 그런 기대를 할까? 일단 스펙을 쌓고 구직활동을 하느라 직장생활을 늦게 시작하는 바람에 40세가 되어도 직장경력이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니 부장은 언감생심, 과장 정도밖에 하기 어렵다. 이것이 이를테면 각 세대가 겪는 경험의 차이다. 이처럼 코호트 사이의 변화를 추적하다 보면 변화의 방향이 드러나고, 자연스럽게 미래에 어떤 현상이 가속화될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p.118; 12-18, p.119; 1-15)

  청년층의 구직이 힘든 이유는 인구가 많은 베이비부머 1, 2세대와 경쟁해야 할 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인건비가 왜 높은가? 노동조합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조직이 고령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존 직원들이 나가지 않는다면 회사 규모를 계속 키우지 않는 한 신규직원을 뽑을 수 없다. 그러니 고참들만 많아지면서 연령구조가 점점 기형적으로 변해간다.

 인사관리 분야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예전에 어느 대기업에 인구학 강의를 갔는데, 고령화의 심각성에 관해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그런가 보다' 하는 표정으로 별반 감흥이 없었다. 아무래도 남의 얘기처럼 생각하는 듯하여 인사팀에 요청해 생산직을 제외한 관리사무직 임직원들의 연령분포를 뽑아달라고 했다. 자료를 보니 2013년 현재 5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16%였고, 대부분 임원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비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50세 이하 임직원의 대부분이 40대였던 것이다. 40대도 초반이 아니라 중후반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30대는 조금 있었지만 20대는 거의 없었다. 현재와 같은 비율로 입사하고 퇴사한다고 가정한다면, 10년 후 이 회사 임직원의 40%는 50대가 차지하게 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50대면 아무리 못해도 부장, 이사급일텐데 그들의 연봉을 누가 주겠나. 기가 막힌 신제품을 내놓든, 제품 가격을 올리든 돈을 획기적으로 많이 벌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10년 안에 이들의 상당수를 내보내야 한다.

 이 이야기를 해줬더니 청중의 표정이 드디어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사원인 이상 당장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10년 후에 잘릴 가능성이 지금 우리 부장보다 더 높겠구나!'

 지금도 경기가 좋지 않아서 많은 이들이 부장 직함도 달지 못하고 구조조정되는데, 이제는 경기가 개선되어도 고령화 때문에 구조적으로 밀려날 이들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p.120; 15-21, p.121; 1-21, p.122; 1-3)

 회사 입장에서도 노동안정화는 좋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다고 노동유연화를 선택하기에는 빠른 회전율 때문에 사원들의 숙련도가 걱정된다. 우리나라에서의 미래가 전혀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아서, 기업들은 해외진출을 선택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값싼 노동력과 넓은 부지를 얻기에 최적이다. 해외진출한 기업들을 보면 국위 선양에 한 몫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읽은 후에는 한 편으로는 청년들의 일자리를 잃은 아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세대 간의 갈등이 다른 양상으로 펼쳐질 가능성이 높다. 흔히 생각하듯 청년층과 노년층, 즉 2030대 5060의 갈등이 아니다. 인구학적으로 더 눈여겨보아야 할 세대갈등은 베이비부머 1세대와 베이비부머 2세대 간의 갈등이다. 우리나라 베이비부머 1세대는 1955~64년생, 2세대는 1965~74년생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58년 개띠'와 '70년 개띠' 간의 대결이랄까.

 이 두 세대는 인구 크기가 얼추 비슷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그 중 베이비부머 1세대가 이제 막 은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은퇴와 관련해 노동시장에 만들어놓은 대표적인 작품이 '정년 연장'이다. 이들은 은퇴가 목전에 닥치자 고용을 안정화하는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은퇴연령을 60세로 늦췄다. 자신들의 노후를 그렇게 해서 조금이나마 안정시켜둔 것이다. 그래도 어쨌거나 은퇴는 해야 했다.

 그들이 노동시장에서 빠져나가면 그 다음으로 2세대가 슬슬 은퇴를 준비해야 한다. 나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우리 2세대들은 어떤 대책을 세울까?

 베이비부머 2세대는 1세대보다 인구가 더 많다. 그리고 이들은 공부도 더 많이 했다. 바야흐로 지금 한국사회의 주도권은 이들 2세대가 쥐고 있다. 만약 여러분이 베이비부머 2세대라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하겠는가? 지금은 기득권을 쥐고 있지만 경기가 어렵고, 자식에게 노후를 의탁할 수도 없다면?

 은퇴를 아예 없애면 된다. 은퇴 없이 평생 일하는 신화를 만드는 것이다. 가만히 보니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세대는 크기가 작아 힘이 없는데다 상대적으로 사회생활도 늦게 시작했으니 경험도 많지 않다. 2세대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국가도 좋을지 모른다. 이들이 한꺼번에 은퇴하면 국가가 이들에게 복지정책을 펴야 하는데 돈이 부족하지 않은가. 그러니 2세대가 은퇴하지 않는 게 국가로서도 나쁘지 않다. 2세대는 대부분 아직 40대이므로 마음만 먹으면 몇십 년은 더 현역으로 뛸 수 있다. 뒷세대들의 일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들겠지만,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정치적 힘이 없으므로 2세대의 계획에 맞서 싸우지 못한다.

 오히려 반발은 엉뚱한 데서 온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1세대들이 한 마디 한다. '뭐야, 왜 너희만 은퇴 안 하고 계속 있어? 너희나 우리나 나이차도 별로 안 나는데. 그럼 나도 돌아갈래.'

 실제로 이런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70세 이상의 노인들은 실버취업을 해도 용역 등 급여가 높지 않은 단순노무직으로 흡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베이비부머 1세대들은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 자산도 있어서 당장 생계가 급하지도 않다. 그러니 급여가 낮은 단순노무직은 성에 차지 않는다. 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는 안정적인 자리,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 자신이 얼마 전까지 있었던 바로 그 자리다. 지금 그 자리에 누가 있는가 하면, 은퇴도 없애버리려 하는 2세대들이 차지하고 있다. 선배 교수들이 은퇴하고 난 다음 내가 70세까지 계속 교수로 있는 형국이다. (물론 교수는 그러기 어렵다. 대학이 위태로우므로.) 2세대의 은퇴시점이 다가올수록 이 두 세대 간의 격돌이 본격화될 것이다.

 상황은 베이비부머 2세대에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아직 현역이고 현재 우리 사회 최대의 기득권층이므로. 그렇게 되면 1세대들은 어디로 가야 할까? 이 국면에서 애꿎게 청년들의 취업시장으로 불똥이 튈 가능성이 크다.

 일반적으로 30~50대는 업무와 관련된 기술과 지식, 경험이 절정에 이르기 때문에 까다롭고 전문적인 일을 하고, 20대 신규취업자들은 경력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고 부가가치가 낮은 일을 맡곤 한다. 그러므로 이 두 세대가 취업전선에서 충돌할 일은 별로 없다. 그러나 50대 이후 은퇴를 맞이한 이들은 사정이 다르다. 일을 아예 하지 않고 노느니 뭐라도 하는 게 경제적으로나 건강 면에서 낫기 때문에 가능하면 일을 하고자 한다. 자신이 하던 일로 돌아가기가 여의치 않으면 아쉬운 대로 취업이 쉬운 일자리라도 찾으려한다. 바로 20대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그 자리다. 2014년부터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시작돼 향후 20여년간 매년 70~90만 명이 은퇴자가 될 것이다. 청년들의 취업문제를 생각할 때 이들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아무리 청년층이 규모가 작고 힘이 없다 해도, 상황이 이쯤 되면 고령층과의 세대갈등이 아예 발생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령인구가 은퇴를 미루면 취업시장에서 부딪칠 것이고, 은퇴해서 연금을 받기 시작하면 그 엄청난 부양 부담을 젊은이들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든 충돌은 예고돼 있다. (p.158; 7-21, p.159, p.160, p.161)

 베이비부머 세대와 2030 세대의 충돌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젊은 층에게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한국에서 권력을 양분하는 두 정당이 모두 보수당이 되는 것이므로. 2030은 인구 크기가 작아서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미래 어느 시점에 젊은 층이 주류가 되리라 전망하기도 힘들다. 10여년 후에 2030이 될 현재의 10대들은 40만 명밖에 안 되는데, 그들이 아무리 소리쳐봐야 90~100만 명씩 태어나던 1, 2세대들을 어떻게 이기겠는가. 2030에게만 1인 2표를 준다면 모를까, 정치공학에서는 100만 명을 놔두고 40만 명과 연대할 이유가 없다. (p.163; 10-18)

 2030 세대가 더욱 투표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베이비부머 세대들과 싸우는 것은 앞으로도 힘들 것 같다.


 저자는 해외 진출을 독려하고 있으면서도, 미래 한국을 미리 보여줌으로써 변화도 함께 꾀하고 있다. 우리는 그 변화에 맞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 강주헌 옮김 / 김영사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대출 도서 1위 도서로 유명한 『총, 균, 쇠』를 집필한 세계적인 문화인류학자이다. 사실 그의 생각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다면 『총, 균, 쇠』를 읽는 것이 더 맞는 선택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처음 그 책을 접하는 사람이라면 왜 이 책을 추천하는지 알게 될 거다. (무척이나 두껍다. 2013년판 기준 760쪽...!) 이 책은 저자의 생각을 간단하게 요약해준다. Pre-『총, 균, 쇠』라고 보아도 무방할 만큼! 빈부 격차의 차이, 사회적 또는 세계적 문제같이 무거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지만 일반인들이 널리 읽기에 충분하도록 쉽게 쓰였고, 저자 나름의 압축적인 해결책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과학이나 공학 분야의 책을 더 좋아하는 내가 진중문고 독서감상문 경연대회에서 이 책의 독서감상문을 작성했었는데, 이 쯤이면 이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은 충분히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

 

온대 국가에 비해 열대 국가가 가난한 데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낮은 농업 생산성이고, 다른 하나는 열악한 공중 보건입니다. 농업 생산성부터 먼저 살펴볼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열대 지역이 온대 지역보다 곡물 수확량이 높아야 합니다. … 애초의 기대와 달리 열대 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낮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토양의 비옥도가 낮고 박토이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와 미국 등 온대 지역의 농지는 심토이고 비옥한 편입니다. 빙하가 미국과 이탈리아의 넓은 지역을 반복해 오르내린 덕분이지요. … 열대의 토양이 지닌 두 번째 문제는 무엇일까요? 이탈리아와 미국의 온대림에서 산책하면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와 낙엽이 자주 눈에 띕니다. 달리 말하면, 땅에 떨어져 천천히 썩어가며 토양에 오랫동안 영양분을 방출하는 유기물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열대지역에서는 땅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 유기물이 열대의 높은 기온 때문에, 또 미생물과 작은 동물들에 의해 신속하게 분해됩니다. 게다가 열대의 잦은 비 때문에도 영양분이 토양에 스며들지 못하고 강으로, 다시 바다로 씻겨 내려갑니다. 이처럼 두 가지 이유에서 열대지역의 토양은 박토이고 비옥도가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열대지역의 농업 생산성이 낮은 또 하나의 이유를 찾자면, 온대 지역보다 열대 지역에 동식물의 종이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브라질에는 미국의 조류 관찰자를 즐겁게 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조류도 많지만, 곡물을 감염시켜 병들게 하여 결국에는 생산량을 크게 떨어뜨리는 병원균과 벌레와 곰팡이의 종류도 무궁무진하게 많습니다. (p.27; 17-21, p.28; 17-21, p.29; 7-22)

 지금껏 인용했던 글 중에 가장 많은 내용을 인용했다. 누구나 위도에 따른 빈국과 부국의 차이를 궁금해 하기 마련이다. 특히 예부터 지금까지 부국의 반열에 올라 있는 국가들은 대부분 온대 지역에 속한다. 이 부분은 그 이유를 말끔히 설명하고 있다. 지역의 기온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냉대 기후의 그것을 제외하면 죽음으로 연관될 만큼 크지 않기 때문에 배제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처음 이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해 볼만한 생각인 것 같다. 위의 인용구는 낮은 농업 생산성에 대한 내용만 정리하였는데, 그에 대한 이유를 토양의 비옥도와 동식물 종의 다양성으로 정리하고 있다. 토양의 비옥도를 강우량과 유기물 총량에 비례한다고 행여나 오인할까 열대 지역의 상황에 대한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였다. 특히 동식물의 종이 열대 지역에서 훨씬 다양하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곤충의 종 수(알려진 곤충의 종 수는 80만 여 종이고, 최대 300만 여 종까지 예상하고 있다고 한다!)만 따져도 동물 총 종 수의 75%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괄목할 만하다. 우리가 해결책을 몰라서 생기는 각종 생물들이 일으키는 여러 가지 질병들을 해결한다면 지구의 구원자라는 명칭으로 부르더라도 과하지 않을 것 같다.


반면에 열대지역의 질병들은 한 번 걸리더라도 면역력이 생기지 않는 재발성 질병입니다. 그 질병에 언제라도 다시 걸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인에게 가장 친숙한 재발성 열대 질병은 말라리아일 것입니다. 열대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열대기후권 사람들을 괴롭히는 기생충과 원생동물 등 질병을 옮기는 병원균에 대한 소문을 들었거나, 그 질병에 직접 걸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p.31; 9-16)

 책에서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열대지역의 질병들이 재발성 질병(recurrent disease)인 것은 위에서 언급한 생물 종의 다양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특히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Plasmodium은 원생생물계에 포함된 생물이다.(원생생물계는 진핵생물역에서 다른 계로 분류하기 어려운, 특징의 공통성을 알기 어려운 생물을 모아둔 집합이다. 따라서 어떤 공통성을 가진 집합이 아니라 균계, 식물계, 동물계의 합집합의 여집합으로 볼 수 있다.) 다른 질병에 있어서도 열대 지역에서는 원생생물계에 속하는 생물들이 일으키는 질병이 유독 많은 편이다. 열대 지역에서 창궐하는 바이러스 또한 생물, 무생물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개체이다.

 장황한 열대림은 이러한 열대의 다양한 생물에 접근하는 것을 크게 방해하는 요소이다. 열대림을 파괴하지 않고 생물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수없이 해보았다.

 열악한 공중 보건은 경제적 차이로도 이어지는데, 이는 책에서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짧은 기대수명과 높은 사망률은 생산성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 어린 나이에 사망할 확률이 높은 까닭에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일인당 평균소득이 낮아지게끔 만들고, 자식의 양육을 위한 여성의 가사 활동은 노동력의 증가를 크게 제한하는 요소이다.


가난을 부채질하는 또 하나의 지리적 요인은 육지에 둘러싸인 입지 조건입니다. … 세계에는 바다와 전혀 접하지 않은 데다 선박이 항해할 수 있는 강도 없는 국가가 많으며, 그런 국가의 상황은 무척 다릅니다. (p.37; 1-2, 13-15)

 내륙이라는 입지 조건은 국가에 있어서 매우 불리한 조건 중 하나이다. 해상 운송 수단은 최저 운송비를 자랑하는 수송의 꽃이고, 해군이 없다는 것은 국방력의 확대와 작전 지역의 제한 요인이다. 이는 유럽의 내륙국들이나 남미의 내륙국들(파라과이, 볼리비아)의 지갑 사정을 해안을 접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천연자원이 풍부한 국가가 부유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거꾸로 가난한 경향을 띱니다. 이런 이유에서 경제학들이 '천연자원의 저주(curse of natural resources)'라는 말까지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 실제로 천연자원은 일부 지역에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경향을 띱니다. 이런 차이가 내란과 분리 독립 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천연자원은 부패와 비리를 조장하기 때문에도 저주로 여겨집니다. … 천연자원을 개발하면 막대한 돈이 흘러들기 때문에 해당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기 마련입니다. 이런 현상도 천연자원의 저주를 부추기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그들은 높은 임금을 받기 때문에 값비싼 물건을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물가가 자연스레 상승합니다. 하지만 고임금과 고물가의 기조가 계속되면 경제를 지탱하는 다른 산업 분야들이 천연자원 분야와 경쟁해서 버텨내기 어렵습니다. (p.39; 11-13, 16-18, p.40; 1-2, 12-18)

 이 내용까지가 지리적 요인에 의한 국부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45쪽까지의 비교적 짧은 내용이지만, 작가의 견해 대부분을 담고 있어서 만약 이 책을 읽을 여유가 별로 없다고 하면 이 부분까지만 읽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 천연자원의 저주는 우리가 흔히들 빈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예시들을 포함한다. 나이지리아, 앙골라, 콩고, 시에라리온, 볼리비아...

 한 분야에 있어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고 있더라도 순위권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요인들의 오차 없는 조합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 있어 대한민국은 그 낮은 확률을 뚫고 10위권에 오른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 문단에서 우리는 나라 탓을 하기보다 더 살기 좋은 국가 건설을 위해 우리 스스로가 무언가 바꿔나가야함을 알 수 있다.


 이 이후의 내용은 중국의 이야기와 개인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내가 느끼기에는 중국의 이야기는 참고해 볼만한 이야기이고, 개인의 이야기는 자기계발서 느낌의 서술이다. 국부를 결정하는 제도적 요인은 중요하지만,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로 여겨져 생략했다.

 이 책은 지식인들이 읽기보다는, 그냥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 정도 내용은 알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우습게 쳐다볼 수는 없을 것 같다.(너무 생각을 막 적어댄 글인가...ㅠㅠ)

죽음의 수용소에서

Man's Search for Meaning: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빅터 프랭클 지음 /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그동안 너무나 많이 들어왔던(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지만) 끔찍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쓴 것이다. (p.25; 5-9)

 지금까지 우리가 나치 독일에 관한 영상이나 글을 읽었을 때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지 잘 생각해보자. 당시 연합국이나 현대인의 입장에서 나치 독일의 행태를 그저 '잔혹한 것, 홀로코스트!'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떤 기분이었을지 수감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는 친구까지도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29; 5-12)

 위에서 말했듯 우리가 수감자의 입장이라면 과연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 죽어 갔을까? 생존을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 선(善)을 지키는 것은 나름대로의 승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경쟁에서 패배한 사망자일 뿐이기도 하다. 힘세고 영리한 방법보다 간사하고 파렴치한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수감자들은 생존을 갈구하는 악인(惡人)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수감자들이 카포가 되고 싶어 갖은 잔인함을 갖춘 인간이 되어가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수감자들은 첫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도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p.49; 5-8)

 여기서 말하는 첫번째 단계는 소지품을 모두 빼앗기고, 나체로 매질을 당하며 초면인 사람들과 함께 샤워를 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이후로 씻을 수도 없고 상처를 치료할 수도 없는 일련의 고충들의 집합이다. 그들은 잠깐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히려 자살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죽음이 임박했다고 느끼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만들었다. 자살을 통해 고통스럽게 죽으나 가스실에서 죽으나 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한 것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 파트의 제목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만든다'는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p.71; 1-3)

 수감자들은 점차적으로 모든 일에 무감각해졌다. 그래서 정서도 메마르게 되었다. 본문에서 필자는 타 수용소로 가는 열차 안에서 고향의 모습을 잠깐이라도 보기 위해 다른 수감자들에게 애원과 간청을 아끼지 않지만, 그들은 "여기서 살았었다고? 그렇다면 벌써 실컷 보았겠네!"라는 말로 비웃으며 묵살했다. 법치가 불가했던 고대 인간의 삶은 힘을 가진 자에 의해 이렇게 지배당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 공화정이 대세인 시대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행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이 말은 곧 아주 사소한 일이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p.88; 12-14)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 맞다. 다른 수용소로 옮겨 가면서 화장장이 없는 수용소로 가는 것이 기뻐 환호한 필자의 경험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특히 최근 고질적으로 확대되어 온 사회의 무기력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중재가 필요하다. 행복 지수 1위라는 부탄의 일반 국민이 느끼는 행복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행복 지수라는 다소 주관적인 지표를 믿는 대신 오늘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그 행복을 위해 노력해보자. 적어도 나는 그게 진짜 '삶'이라 생각한다.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p.137; 1-4)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p.137-138; 13-17, 1-3)

 삶의 목적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우리는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삶을 사는 것일까, 아니면 삶을 살기 위해 무언가 성취하는 것일까? 필자는 그 답을 후자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필자의 글을 보는 순간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에 의문이라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지만, 화용적 언어 발달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성인이라면 부정이나 거절의 어조도 약간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극한 상황 속에서 지금의 삶을 얻어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이 살아야 하는 삶에 남이 끼어들어 간섭하기는 힘들다. 어디 가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고민을 해결할 의지를 가진다면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의외로 그들이 대체할 수 없는 것을 잃어버린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살아있는 사람들은 희망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건강, 가족, 행복, 전문적인 능력, 재산, 사회적 지위 - 이것은 모두 나중에 다시 가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때 나는 니체의 말을 인용했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다." (p.145; 5-11)

 정말 유명한 니체의 명언이다. 바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아서 길게 말하진 않을 테지만, 한 마디로 필자의 입장을 말해주는 어구라서 인용해보았다.


우리는 세상에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의 모든 집단에 들어가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혹은 악한 사람들만으로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 감시병 중에도 가끔씩은 좋은 사람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 (p.152; 2-9)

 도덕 시간에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성선설'과 '성악설'을 믿을 수 없는 이유이다. 가장 복잡하고 변덕스러운 동물인 인간을 완벽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눌 순 없다. 책과 같이 두 부류로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저번 학기 '말과 마음' 수업에서 들었던 것에서 생각해보자. 어떤 단어를 정의하는 고전적인 방법은 속성의 집합체로 보는 것과 어느 집합의 전형으로 대표되는 한 가지를 생각하는 것, 이렇게 두 가지이다. 인격이 어떤 속성을 지니는지 생각해본다고 치면, 각자의 인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한 가지 명제에 대한 참, 거짓을 가리기 쉽지 않다. 모든 인격이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포함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할 수 없는 것이 한 예이다. 만약 인격이 어떤 전형으로 대표될 수 있다고 하면 그 누구의 인격이 인격의 대표가 될 것인지 정할 수 없다. '인격'은 복잡한 추상명사이다.

 선과 악을 0과 1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품성을 평가한 데이터를 점 그래프로 나타내면 거의 연속적인 정규분포표가 나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형이상학에서도 수학을 사용할 수는 없을까?ㅋㅋㅋ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은 느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 사람이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p.154; 9-16)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했었다. 위에서는 분명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수감자들은 오랜 수감 생활에서 갑작스럽게 해방을 맛보게 되었다. 느끼지 못할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큰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갈망하던 해방이라는 꿈을 성취했음에도 불구하고 큰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이 순간이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확신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이전의 힘들었던 나날들과 현재의 차이를 몸이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또한 현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미래가 그리 밝지만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마지막 줄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은 비단 유럽에서의 일만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광복하던 날, 우리 국민들은 환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며칠 뒤 그 의미를 깨닫고, 우리 민족의 밝은 앞날을 기대하며 만세를 불렀다. 수감자들또한 이후에 못 먹던 밥을 몰아서 엄청나게 먹었다는 부분에서 그제서야 행복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어떤 성취를 이루어도 이처럼 바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자. 기다리면 내 성취의 의미를 깨닫고 환호할 날이 다가올 것이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을 하는 쪽이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p.157; 13-19)

 사람답게 살지 못하던 수용소의 환경에서 벗어난 수감자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그런 위치에서 벗어난 것이 해방이 아니라 지위가 향상된 것이라고 착각한다. 수감자라는 집단이 선으로만 가득 차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살아남는다는 면에서는 큰 성취를 이루었을지 모르나 결국 인격적으로 실패한 동물이 되기를 자처하였다. 그들은 나치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와도 같았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가지게 해준다. 나의 아버지는 꾸중을 하실 때나 고민을 들어주실 때 항상 극한 상황으로 치닫았을 때의 이야기를 하셨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말투가 나를 무시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물론 너무 어릴 때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내 정신 건강에 좋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말씀 하나하나에 나의 의지를 북돋아주고 혼자 이겨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려고 했던 의도가 가득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기력'이 만연한 요즘, 우리는 이 책을 보고 '어떤 것'을 느껴야 할 것 같다.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도시를 보는 열다섯 가지 인문적 시선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그런 구성이기 때문에 시민에게 개방하기 위해 광화문 광장을 만들었지만 항상 정치적 시위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앙 집중식 공간은 거리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 전체적인 공간의 속도를 낮추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43; 13-15, 17-19)

 사실 우리 국민들에게 광화문 광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다른 나라의 광장들과는 달리 교통 체증, 의경, 시위, 세종대왕상 같이 '광장'이라는 타이틀에 그리 적합하지 않을 이미지만 연상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까지 광화문 광장을 어떻게 이용했을까? 왜 타국 광장에 비해 걷고 싶지 않은 광장일까? 공간의 속도로 일부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필자가 말하는 대로 만약 광화문 앞에 노천 카페가 많이 생긴다면, 교통량을 분산시키고 가로수를 심는다면, 대형 건물의 입구를 늘린다면 그 후의 일은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모텔의 창문만 크게 바꾸어서 호텔로 리모델링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렇듯 같은 빌딩이지만 창문의 크기에 따라서 모텔이 되기도 하고 호텔이 되기도 한다. 창문은 건축물의 기능과 사회적·심리적인 요구에 따라서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조절하여 공간의 성격을 규정하는 중요한 건축 요소이다. (p.89; 17-21)

 공간의 성격이 개방적인지 또는 폐쇄적인지에 따라 창문이 달라지는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꼭 모텔이 아니라 평범한 건물을 리모델링함에 있어서도 창문 크기를 바꿈으로써 밝은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일광의 밀도가 이미지에 중요함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좋은 문단이다.


필자는 주택을 디자인할 때 건축주에게 항상 경사진 천장과 복층 공간을 넣으라고 권한다. 이런 공간은 단순 면적 방식으로는 계산이 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래서 면적만으로 계산하는 '평당 공사비'는 항상 높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권하는 것은 분명히 더 좋은 공간이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정확하게 우리가 소비하는 공간을 평가하려면 우리가 사는 집들도 이제 체적으로 계산해서 팔아야 한다. (p.93; 9-13, 16-18)

 주택은 평당 공사비와 상관없이 거주자에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공간으로서 마련되어야 한다. 복층 공간이나 적당히 높은 천장은 안락함과 편안함을 주고, 주택이 왜 아파트보다 넓어 보이는지를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는 건축 기술인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남대문이 오래 묵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수백 년 전 조선인이 디자인하고 당대 최고 구축 기술로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로서의 가치를 가졌다는 것이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중국의 대표적인 건축 문화재이다. 우리는 역사 시간에 이 만리장성이 진시황제가 만들었다고 배웠지만, 실은 지금의 만리장성은 명나라 때 도자기 수출한 돈으로 개축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까지도 진시황제의 만리장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랑캐를 막기 위해서 장성을 만든 개념이 진시황제 때 만들어진 것이고 그 개념이 문화재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건축은 오브제의 성격이 강한 도자기나 그림과는 다르다. (p.116; 3-12)

 나 또한 어릴 적 숭례문이 불탔다는 뉴스를 보고선, '국보 1호가 영영 사라졌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TV로 문화재가 타는 모습을 지켜보는 슬픔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문화재들을 하드웨어로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리장성의 예는 우리의 관념을 탈피해야 한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수라간에 레스토랑이 있고 경복궁이 박물관으로 사용되면 안 되는 걸까? (p.118; 15-17)

 이 경우는 위의 사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건축을 오브제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작품'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하지만 건축물이란 본디 시대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고, 그렇게 흘러감에 따라 본연의 멋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 예전 쓰임처럼 요새로만 남아 있었다면 그렇게 유명한 관광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수라간에 레스토랑을 차리는 것이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질 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런 적극적인 접근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근대에 와서는 반대로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을 주는 가까운 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반영한 교회가 근대 건축의 거장인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롱샹 성당'이다. 이 성당은 제단이 있는 쪽이 사다리꼴의 넓은 변 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뒷자리에 앉아 있는 신자가 제단을 바라볼 때 실제보다 가깝게 느껴지게 디자인되어 있다. (p.177; 9-14)

 공간에 따라 위계가 달라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각종 선거 후보들이 롱샹 성당과 같은 곳에서 유세를 한다면 더 가까운 느낌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한강 고수부지처럼 24시간 사용 가능한 수변에 위치한 도심 공원은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p.202; 6-7)

 외국에 다녀와본 대부분의 독자라면, 야간에 공원을 이용하는 것이 그리 안전한 나라가 별로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한강 고수부지는 강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상위권인 야간 치안 상태를 바탕으로 통행 밀도가 매우 높은 도로들을 접하고 있어 안전하고 편리한 공원이다. 앞으로의 강남 개발은 공원과 도심을 이어줄 수 있는 '도시 재생'의 형태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망 좋은 한강변 아파트를 구입하기는 어렵지만, 고수부지 주차장에만 가면 강변 전망의 방을 소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자동차이다. 자동차 공간을 더 프라이빗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은 더 짙은 썬팅 필름지를 붙이기도 한다. 썬팅지는 어두운 곳에서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고, 밖을 보는 관음증을 만족시켜 주기도 한다. 짙어진 자동차 썬팅은 여름철 냉방에 도움도 되지만 점점 더 복잡해지고 혼란스런 세상을 지워 버리는 현대인의 생존 기술 중 하나이기도 하다. (p.222; 1-8)

 주요 내용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문장이었다. 우리는 자동차라는 것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생각해볼 타이밍이다.


 건축이야말로 통섭적인 학문이 아닐까? 감성적,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하면서도, 효율과 용적을 따져야 하는 것이 바로 건축이다. 이런 모든 조건을 만족해야 비로소 완벽한 건축물이라고 불릴 수 있고, 아직도 그런 건축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처사이다.

 스케일을 바꾸면 시선도 달라진다. 위에서 말했듯 건물 하나를 보고 완벽한 건축물이라고 느끼기는 힘들지만, 아름다운 도시를 보고 완벽한 곳이라고 느끼기는 덜 어렵다. 더 크게 보아 지구를 완벽하지 않은 행성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처럼. 건물 미니어처를 생각하면 이와 반대의 경우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스케일에 따라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준다. 휴먼 스케일과 조감도의 차이, 안과 밖의 차이, 대지와 공중의 차이. 모든 상황에 있어서 스케일을 바꾸어 생각할 수 있다면 우리도 좀 더 완벽한 사람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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